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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역사적사건

광주학생항일운동 과 학생독립운동기념일 5분 완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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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항일운동(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9년 11월부터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독립운동입니다. 해방이후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게 되었는데요. 오늘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지정된 이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 광주학생항일운동 원인

1919년 3.1일운동 이후 일본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를 하던 시기였던 1920년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1929년 10월 30일 당시,  나주역에는 학생들을 태워 학교로 오고가는 통학열차가 다녔는데요. 열차 안에는 자연스레 한국학생과 일본인학생이 함게 타며 등하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날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였던 이광춘, 박기옥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놀리고 희롱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된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이자 희롱당하던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준채는 참을 수 없었고 바로 일본인 중학생에게 반발하며 그만두라고 말하지만 일본학생들은 아랑곳 않으며 그의 말을 무시했죠. 그러자 박준채와 희롱하던 학생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고 그건 열차 안의 한국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난투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투극 소식을 듣고 온 일본경찰들에게 전후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일본학생들편만 들어주며 오히려 광주고보 학생들을 처벌하는등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그로인해 광주보고 학생들은 집단항의를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제1차 광주학생운동으로 번지게됩니다.

 

▣ 제1차 광주학생운동

1929년 11월 3일은 일본 천황탄생을 축하하던 기념일이였기에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며 축하해야했지만 조선학생들은 침묵하며 반일감정을 드러냈고 당시 박준채의 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에도 우르르 몰려가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반일감정이 폭발하는 사건이 또 한번 일어나게 되는데요. 바로 광주고보의 학생이 광주중학교 일본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하게 되고 결국 폭력사태까지 일어나게 욉니다.

 

당시 광주고보의 장재성은 항일운동의 행동방향을 제시하며 광주농고 학생들과 함께 일제를 물리치자는 행진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진행하게 됩니다. 이 때 시위에 참가한 70명의 학생 중 60명을 구속하며 탄압당했으며 동아일보, 조선일보등의 언론사에서도 탄압과 차별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하게 됩니다.

 

 

1차 광주시위운동이 끝난 뒤 장재성은 포기하지않고 2차 시위를 위해 학생들을 설득하는 호소문을 작성해 1,000장의 인쇄물을 인쇄하게 됩니다. 그런 뒤 1929년 11월 12일 오전 8시에 당시 인쇄를 담당한 오쾌일이 광주고보와 농고의 학생들에게 인쇄물을 전해줍니다. 이번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하며 동맹휴학등으로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일제는 또한번 250명 가량의 학생들을 검거하며 더 나아가 학생이 아닌 사회운동단체의 간부들도 검거합니다. 

 

이렇게 경찰에 검거된 학생들은 학교자체적인 처벌 역시 주어졌고 대부분 무기징역이나 퇴학의 조치를 당했습니다. 그리하여 교실의 빈자리가 늘어가기 시작했죠. 일제는 만족하지않고 12월 28일까지 언론마저 통제하여 학생 항일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탄압과 입막음이 심해질수록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들로 인해 결국 항일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당시 "약소민족해방만세! 제국주의타도만세! 피압박민족해방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라는 구호로 대응하며 민족적 차별과 업악에 맞서게 됩니다. 이 때 많은 여학교들의 여학생들도 참여하며 시위는 점점 더 커집니다

 

▣ 전국으로의 확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들이 합쳐 만든 항일단체인 신간회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을 접하고 전국시위로 확산하도록 도와주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파악을 위한 활동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단체와 학생들의 협동으로 인해 서울의 각 학교에 까지 광주학생들의 시위의 전말과 항일운동참여 호소격문이 뿌려지고 12월 9일부터 서울지역 학교들의 시위가 시작됩니다. 

 

이 당시에 하루에 1200명 가량의 학생들이 체포되고 35명이 재판에 회부됩니다. 이로 인해 신간회에서 다음날인 12월 10일 주요인사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게 되고 12월 13일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를 가지며 군중을 선동하여 다시한번 더 시위운동을  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일본경찰의 방해로 진상발표회는 열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간회 각 지방의회에는 지시문이 이미 전달되었고 1930년 초까지 전국적으로 항일시위 만세운동이 계속 됩니다. 시위는 만주의 한인지역까지 퍼져 해외단체까지 확대되었습니다. 

 

▣ 결과 및 의의 

독립운동에 참가한 많은 학생들은 퇴학 이나 무기징역이라는 불공정한 처분을 받게되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 민족의 독립의지를 보여준 계기가 되었고 해방후에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기념지정하는 등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선대의 민족정신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숭고한 업적임을 느끼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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