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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역사적사건

암태도 소작쟁의 5분 완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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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소작쟁의

오늘의 역사 바로알기 주제는 <암태도 소작쟁의> 입니다.

 

<암태도소작쟁의>는 1923년 8월 ~1924년 8월, 약 1년에 걸쳐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인들이 벌인 소작농민항쟁입니다. 

 

Q. 소작농이란?

  • 토지가 있는 지주로 부터 땅을 빌려서 경작(농사)를 짓는 사람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암태도 소작쟁의>에 대해 알려드릴께요!

 

▲ 암태도 소작쟁의 5분정리

Q.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나게된 그 당시 사회배경?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난 1923년은 일제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조선에서 수확되는 쌀의 대부분을 일본으로 수출이 되어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민들이 자기의 땅을 떠나 만주나 간도 지역으로 갔고 남은 이들은 가지고 있던 자신의 땅을 수탈당하는등으로 인해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작농으로 전락된 농민들의 상황 역시 좋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수확량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지주에게 바쳐야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소작료 외에도 말도 안되는 이름으로 뜯어가는 세금으로 인해 생활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렇게 불만이 쌓여가던 농민들은 점점 하나둘씩 소작쟁의를 통해 본인들의 불합리함을 알리기 시작했는데요. 그런 농민운동은 특히,산미증식계획으로 일제의 수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20년대에 제일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2년엔 21건, 1923년에는 176건, 1925년에는 무려 204건으로 거의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났습니다.

 

그 중 오늘 소개해드릴 1923년 8월에 일어난 암태도소작쟁의는 그 당시 일어났던 농민운동 중에 제일 대표적인 소작 쟁의라고 불리는데요. 지금부터 암태도 소작쟁의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암태도 소작쟁의 원인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암태도 소작쟁의의 원인은 농민들에게 과도한 소작료징수를 하려고 했던것입니다.

 

당시, 1920년대에 저미가정책으로 인해 쌀의 가격이 낮아져 땅의 주인인 지주의 수익 역시 낮아지게 되자 소작료를 올려 낮아진 수익에 대한 손해를 보충하려고 했습니다.

 

암태도소작쟁의

그 때 암태도에서는 7~8할정도의 소작료의 징수하게 됩니다. 너무 높은 소작료에 소작농민들은 결국 1923년 9월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서태석(위키백과)

<암태도소작회>는 당시 암태도의 대표적인 3명의 지주인 문재철, 천후빈,일본인 지주 나카시마 세이타로에게 소작료를 4할이하로 인하해줄것을 요구합니다.

 

이 때 다른 지주들은 수궁했지만 문재철이 거절하는 바람에 무산이 되었고 이로 인해 <암태소작인회>는 소작료를 납부하지않겠다며 저항했습니다.

 

만약 그 때 문재철이 다른지주들처럼 소작인들의 의견을 수긍했다면 아마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암태도소작쟁의

문재철은 소작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깡패들을 고용해 소작인들을 폭행하고 협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당한 소작농민들은 크게 분노했고 문재철의 부친을 위해서 세워둔 송덕비를 훼손하고 깡패들을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주게 됩니다.

암태도 소작쟁의

이 사건으로 인해 소작인 50명정도가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그 중 <암태소작인회>를 이끌었던 서태석을 포함한 13명의 주요인물들은 목포로 이송되기까지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과 소작인들을 포함 암태도 주민 전체가 봉기하게 됩니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

 

서태석을 포함한 13명의 농민들이 잡혀가자 원래는 뒤에서 지켜만 보고있던 암태청년회와 암태부인회가 소작쟁의에 참여하게 되면서 암태도 전 주민의 일로 번지게 됩니다.

 

암태도소작쟁의

6월 2일 소작인들과 가족들은 다시한번 면민대회를 개최해 목포에서 항쟁할 것을 약속하고 6월 4일부터 8일까지 400여명의 소작농민들이 모여 목포경찰서와 목포법원앞에서 시위를 하게 됩니다.

 

7월 8일엔 400명보다 더 늘어난 600명의 소작농들이 법원앞에서 단식투쟁까지 하게 되죠.

 

거기서 그치지 않고 3일뒤인 11일에는 암태도 소작쟁의의 원인인 친일지주 문재철의 집앞으로 모여 시위를 벌입니다. 그 과정에서 26명이 연행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암태도 소작쟁의가 서울과 평양등 대도시로 확대되게 되고 여론 또한 들썩이려고 하자 일제는 소작쟁의의 확산을 막는 차원에서 중재에 나서게 됩니다.

 

◈ 암태도 소작쟁의 결과

일제의 중재로 결국 지주 문재철과 소작농의 대표 박복영이 타협을 보게 됩니다.

 

※ 타협의 결과 ※

1.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회간의 소작료는 4할로 약정, 지주는 소작인회에 일금 2,000원을 기부한다.
2. 1923년 미납소작료는 향후 3년간 분할상환한다.
3. 구금 중인 쌍방의 인사에 대해서는 9월 1일 공판정에서 쌍방이 고소를 취하한다.
4. 도괴된 비석은 소작인회의 부담으로 복구한다.

이렇게 소작농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타협을 본 뒤 소작쟁의는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곳곳의 소작농들이 영향을 받아 1925년에 일어난 도초도 소작쟁의, 1926년의 자은도 소작쟁의, 1927년 지도 소작쟁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소작농민들이 점차 농촌 문제와 민족 문제에 대해 스스로 자각하며 능동적인 대처를 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 소작쟁의 중 가장 큰 성과를 얻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은 <암태도소작쟁의>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럼 다음시간에도 유익한 포스팅으로 돌아올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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