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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독립운동가

임술농민봉기(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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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술농민봉기 편하게 보기 ▲

임술농민봉기는 1862년 임술년에 발발했다는 의미로 임술농민항쟁 또는 임술민란으로 불립니다

임술농민봉기는 1862년 음력 2월 4일 단성민란, 음력 2월 14일 진주민란으로 시작으로 삼남지방 중부.북부지방을 휩쓸게 됩니다

 

임술농민봉기 발발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이후 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신분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벼슬을 사고파는 행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때 가난한 농민들은 더 가난해지게 되고 세금을 안내는 양반 지주층이나 부자농민들은 더욱더 부유해지게 되는데요.

 

문제는 조선은 국고수입의 많은 부분을 농민에게 의존했기에 모자란 국고를 채우기 위해  2중 3중으로 농민에게 세금을 착취하게 되고
세금을 거두로온 아전들의 행패는 농민들을 더 힘들게 했어요

 

이러한 세금의 문란을 삼정의 문란이라고 하는데 삼정은 전정,군정,환정을 말합니다

 이 삼정의 문란이 임술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죠.

 

정약용의 애절양이란 시를 보면 당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엿볼수 있습니다

 

정약용 애절양

▣ 임술농민봉기 발발

 

진주농민봉기

진주농민봉기는 경상도 우병사(우도를 처리하던 관리) 백낙신의 탐학으로 인해 발발하게 됩니다

백낙신이란 관리는 죽은사람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등 갖가지 패악을 저지르며 농민들을 수탈하고 괴롭힙니다.

 

그러자 몰락양반 유계춘은 여러차례 항의 했지만 묵살되었고 그로인해 무력항쟁을 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유계춘은 농민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진주민란당시 농민,상인등등 모인사람들만해도 수만명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유계춘과 화가 난 농민백성들은 진주성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에 놀란 정부는 안핵사 박규수와 암행어사 이인명을 파견해 사태를 수습합니다

 

진주농민봉기 결과

진주민란 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난 농민들의 봉기는 걷잡을수 없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중앙정부는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개혁을 약속하고 삼정의 문란 개선책을 논의하는 삼정이정청을 설립해 
농민들을 진정시키게 됩니다

 

임술농민봉기 결과

농민들의 봉기로 개혁의 약속을 받아내었지만 안타깝게도 농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점은 농민들의 사회의식이 한층 더 성장했다는 점과 조선시대 양반 중심 체제가 한계에 부딪혔다는점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농민들의 이러한 움직임이 훗날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농민항쟁으로도 계승되게 된다는점을 보면 잃은것보다는 얻은것이 더 많은 농민항쟁이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럼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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